안녕하세요, 떠도는 불의 넋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환상 소설은 Philip Pullman의 His Dark Materials입니다. 밀턴의 [실낙원] 중 한 구절에서 그 제목을 차용한 이 소설은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추방이라는 상징적인 사건을 계몽주의적인 시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기독교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던 영국의 많은 환상 소설과 달리 신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소설은 김영사에서 세 권의 번역본(‘황금나침반’, ‘만단검’, ‘호박망원경’)으로 출간되어 있었으나, 최근까지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낮은 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환상 문학 애호가들이 J. R. R. Tolkien을 필두로 하는 신화적 환상 문학이나 통신 연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국내 환상 문학계에 관심을 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 완결된 작품이었으며 Philip Pullman의 작가로서의 인지도도 높지 않았고, 번역본의 질 역시(사실 대부분의 영미 환상 문학은 번역의 질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만)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는 Northern Lights(영국판의 제목입니다 – 미국판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The Golden Compass를 제목으로 하고 있습니다)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개봉하고, 월간지 Fantastique에서도 이 작품을 짧게 다루면서 인지도가 높아졌습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볼 때 구약성서와 함께, 현대 과학, 특히 물리학의 개념을 어느 정도 차용한 Science Fantasy에 속합니다만 모든 개념들이 현대 과학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먼저,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개념은 암흑 물질로서, [실낙원]을 인용한 제목 자체도 암흑 물질, 즉 Dark Matter(Dark Material)를 나타냅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암흑 물질을 반응성이 낮고 다른 물질에 대한 간섭력이 적어 검출하기 어려우나 우주 질량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물질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암흑 물질이 인간의 이성을 관장하는 입자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암흑 물질로 이루어진 생명체인 천사와 함께 암흑 물질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수단인 alethiometer(alethia는 그리스 어로 진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를 중요한 문학적 장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물리학계의 일부에서 제시되는 병행 세계 가설을 설정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의 병행 세계 가설은 암흑 물질 가설과 달리 일반적인 과학적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역사상에 발생한 사건의 차이로 인해 약간씩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여러 가지 세계들을 의미합니다. 다만, 서로 다른 세계로 여행할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기구들이 언급되며 세계 사이에 있는 심연Abyss의 개념은 상상의 산물들이라는 점에서 역시 순수한 과학 소설로 볼 수는 없습니다. 2부의 제목이기도 하며 다른 세계로 여행할 수 있게 하는, 소설 내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인 The Subtle Knife 역시, 특히 ‘인간의 마음’ 같은 추상적이며 약간은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를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소설로서 이 작품이 갖는 가치를 어느 정도 떨어뜨린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행 세계에 대한 묘사나 설정 면에서 이 부분 역시 현대 물리학과 유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설정은 인간의 영혼을 상징하는, 동물을 닮은 생명체인 daemon입니다. 이 설정 역시 기독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구약성서가 아닌 신약성서와 함께 신약성서에 대한 주석(아우구스티누스로 기억합니다)에 등장하는 ‘인간의 세 가지 부분’, 즉 body, spirit, soul의 spirit에 해당하는 것을 daemon으로서 동물의 형태를 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이 작품을 다룬 환상문학 잡지 Fantastique에서도 지적했듯이, daemon을 통해서 그 사람의 ‘천부적 소질’이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부분은 약간 불편한 설정인 데다가 이 역시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품이 전체적으로 C. S. Lewis의 The Chronicles of Narnia에 대한 antithesis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비-기독교적인 설정으로써 기독교적 관념을 설파하고 있는 Narnia에 대비해서 기독교적 설정으로써 비-기독교적, 계몽주의적 주제를 전달한다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단지, 이 소설 자체가 과학 소설이라기보다는 환상 소설에 가깝다는 점은 다른 과학적인 설정들을 약간 퇴색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설정들만 적당히 기억해 두신다면, 소설을 읽으면서 헷갈린다거나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식의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처음 읽었을 때는 좀 당황스러운 부분이 많았는데, 지극히 일반적인- 설정의 환상 문학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옥스퍼드 대학이 나오는 바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소설의 설정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는, ‘참신함’이 주는 효과를 노리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말이지요. 제가 가지고 있는 Del Rey판에 첨부된, Terry Brooks의 추천사에도 이런 점이 짧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국내에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은 아닙니다만, 비단 국내뿐만 아니라 영미권에서도 D&D와 각종 컴퓨터 게임들이 나타난 이후로 이런 게임들의 설정을 그대로 차용한 ‘양산형’ 환상문학들이나 SF가 범람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선함은 그 자체로 매력이 될 수 있기 떄문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괄목할 만한 점은 설정의 신선함이라기보다는 주제 의식에 있습니다. 비록 러브크래프트와 같은 작가들이 가장 먼저 현대적인 환상 문학에 속하는 글을 쓰기는 했습니다만, 영미 환상 문학의 주류가 된 작품은 JRRT나 C. S. Lewis의,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묻어나면서 정치적으로는 강하게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글들입니다. 톨킨이 정착시킨 환상 문학의 신화적 속성과 더불어, 환상 문학을 창작하는 계층이 중산층 이상, 상류층이었다는 점 때문에 환상 문학은 주로 비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게 되었고 Chronicles of Narnia에서도 볼 수 있듯이 종교적인 색채 역시 띠게 되었으며, 특히 영웅 중심의 서사 구조는 이런 성격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경향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특히 영국에서 계속되어 왔습니다. (미국에서는 어슐러 르 귄과 같은 작가들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경향에 정면으로 반하는 주제를 띠고 있습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작품이 반종교적인 주제를 전달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만, 이 작품은 맹신과 맹종 대신에 합리적인 사고와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결정을 내릴 것을 제시하며, 지식과 사고에 열린 사고와 닫힌 사고를 대비시키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protagonist인 Lyra와 Will에 대비되는 antagonist가 카톨릭 교회라는 사실 역시 이 점에 어느 정도 기여합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카톨릭 교회는 현대의 기독교를 대변한다기보다는 병행 세계라는 점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르네상스 이전의 카톨릭 교회와 닮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작품의 무대가 되는 병행 세계에서는 종교 개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secular humanist를 자처하는 필립 풀먼이 비판하는 여러 대상들 중 하나인, 서아시아의 여러 이슬람 국가들의 정교일치적인 모습을 카톨릭 교회는 나타내고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 2부에서 등장하는 조연 캐릭터인 Ruta Skadi는 이슬람권 국가에서 흔히 행해지는 여성의 할례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가 자신도 해명했듯이 이 작품은 반드시 종교를 가리켜 비판하고 있다기보다 종교에 대한 광신을 비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이런 광신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