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알리는 흐린 안개 속에서
차디찬 신기루에 눈을 감는다
분명 어제도 보았을 창틀 너머로
떠오르는 얼굴은 죽은 듯한 잿빛
흐르듯 흐르듯 묻힌 흐느낌 속에
바라보는 세상에는 숨결 하나 없는가

눈뜨는 새벽을 그리우며 걸으면
빗장 그어 노래하는 발길은 멀어지고
손짓으로 인사하는 먼 동녘 저편에
하늘대는 아지랑이 해를 향하니
서리처럼 마르는 그림자에 고개숙여
하직하고 떠나 간 밝은 아침을 맞아

무엇을 향해 어디로 걸었던가
고개숙여 내려보는 빙하 한켠에
주인 있는 발자국이 기다림 없이 흩어지고
바람에 날리는 꽃잎 쥔 작은 손에
검은 피는 눈물보다 길게 떨어지네

겨울 같은 유리 속 추위를 뚫고
퍼져 가는 섬광을 한 줄기 그어
갈라진 손끝으로 더듬는 언덕에
붉은 나무 한 그루 지팡이삼아
올라서면 햇살 속에 사그라드는
잿더미를 바람 속에 떠나보내리

다시 어디선가 김 올라오는
모래성 안에 곱게 잠들며

Posted by Asuka Feanaro HR

상당히 열받아서 쓴 글인지라 허술한 듯해 읽어 보았는데, 앞뒤 논리가 잘 안 맞는 듯해 일단 뻘글로 간주하고 삭제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생각 같아서는 제대로 된 글로 대체하고 싶으나, 여전히 시간이 별로 없는지라 일단은 양해만 빌어 두겠습니다.;

Posted by Asuka Feanaro HR

안녕하세요, 떠도는 불의 넋입니다.
오늘 소개해 드릴 환상 소설은 Philip Pullman의 His Dark Materials입니다. 밀턴의 [실낙원] 중 한 구절에서 그 제목을 차용한 이 소설은 에덴 동산에서의 인간의 추방이라는 상징적인 사건을 계몽주의적인 시각으로 다루고 있는 작품으로, 기독교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던 영국의 많은 환상 소설과 달리 신화적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이성을 중심으로 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소설은 김영사에서 세 권의 번역본(‘황금나침반’, ‘만단검’, ‘호박망원경’)으로 출간되어 있었으나, 최근까지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낮은 편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환상 문학 애호가들이 J. R. R. Tolkien을 필두로 하는 신화적 환상 문학이나 통신 연재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국내 환상 문학계에 관심을 두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비교적 최근에 완결된 작품이었으며 Philip Pullman의 작가로서의 인지도도 높지 않았고, 번역본의 질 역시(사실 대부분의 영미 환상 문학은 번역의 질이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만) 좋은 편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근에 3부작 중 1부에 해당하는 Northern Lights(영국판의 제목입니다 – 미국판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The Golden Compass를 제목으로 하고 있습니다)를 원작으로 하는 영화가 개봉하고, 월간지 Fantastique에서도 이 작품을 짧게 다루면서 인지도가 높아졌습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볼 때 구약성서와 함께, 현대 과학, 특히 물리학의 개념을 어느 정도 차용한 Science Fantasy에 속합니다만 모든 개념들이 현대 과학에서와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먼저, 작품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개념은 암흑 물질로서, [실낙원]을 인용한 제목 자체도 암흑 물질, 즉 Dark Matter(Dark Material)를 나타냅니다. 현대 물리학에서는 암흑 물질을 반응성이 낮고 다른 물질에 대한 간섭력이 적어 검출하기 어려우나 우주 질량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물질로 정의합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는 암흑 물질이 인간의 이성을 관장하는 입자라는 설정을 바탕으로, 암흑 물질로 이루어진 생명체인 천사와 함께 암흑 물질과 의사 소통을 할 수 있는 수단인 alethiometer(alethia는 그리스 어로 진실을 의미한다고 합니다)를 중요한 문학적 장치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소설에서는 물리학계의 일부에서 제시되는 병행 세계 가설을 설정의 일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서의 병행 세계 가설은 암흑 물질 가설과 달리 일반적인 과학적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은, 역사상에 발생한 사건의 차이로 인해 약간씩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는 여러 가지 세계들을 의미합니다. 다만, 서로 다른 세계로 여행할 수 있게 하는 몇 가지 기구들이 언급되며 세계 사이에 있는 심연Abyss의 개념은 상상의 산물들이라는 점에서 역시 순수한 과학 소설로 볼 수는 없습니다. 2부의 제목이기도 하며 다른 세계로 여행할 수 있게 하는, 소설 내에서 가장 중요한 도구인 The Subtle Knife 역시, 특히 ‘인간의 마음’ 같은 추상적이며 약간은 비과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자를 수 없는 것’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과학소설로서 이 작품이 갖는 가치를 어느 정도 떨어뜨린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행 세계에 대한 묘사나 설정 면에서 이 부분 역시 현대 물리학과 유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설정은 인간의 영혼을 상징하는, 동물을 닮은 생명체인 daemon입니다. 이 설정 역시 기독교적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만, 구약성서가 아닌 신약성서와 함께 신약성서에 대한 주석(아우구스티누스로 기억합니다)에 등장하는 ‘인간의 세 가지 부분’, 즉 body, spirit, soul의 spirit에 해당하는 것을 daemon으로서 동물의 형태를 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이 작품을 다룬 환상문학 잡지 Fantastique에서도 지적했듯이, daemon을 통해서 그 사람의 ‘천부적 소질’이나 ‘성격’을 알 수 있다는 것과 같은 부분은 약간 불편한 설정인 데다가 이 역시 그다지 과학적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작품이 전체적으로 C. S. Lewis의 The Chronicles of Narnia에 대한 antithesis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비-기독교적인 설정으로써 기독교적 관념을 설파하고 있는 Narnia에 대비해서 기독교적 설정으로써 비-기독교적, 계몽주의적 주제를 전달한다는 것 자체는 이해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단지, 이 소설 자체가 과학 소설이라기보다는 환상 소설에 가깝다는 점은 다른 과학적인 설정들을 약간 퇴색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설정들만 적당히 기억해 두신다면, 소설을 읽으면서 헷갈린다거나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식의 느낌은 그다지 들지 않으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처음 읽었을 때는 좀 당황스러운 부분이 많았는데, 지극히 일반적인- 설정의 환상 문학을 생각하다가 갑자기 옥스퍼드 대학이 나오는 바람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소설의 설정 자체가 어느 정도까지는, ‘참신함’이 주는 효과를 노리고 있는 부분도 있지만 말이지요. 제가 가지고 있는 Del Rey판에 첨부된, Terry Brooks의 추천사에도 이런 점이 짧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국내에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은 아닙니다만, 비단 국내뿐만 아니라 영미권에서도 D&D와 각종 컴퓨터 게임들이 나타난 이후로 이런 게임들의 설정을 그대로 차용한 ‘양산형’ 환상문학들이나 SF가 범람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선함은 그 자체로 매력이 될 수 있기 떄문입니다.

  그러나 이 소설에서 괄목할 만한 점은 설정의 신선함이라기보다는 주제 의식에 있습니다. 비록 러브크래프트와 같은 작가들이 가장 먼저 현대적인 환상 문학에 속하는 글을 쓰기는 했습니다만, 영미 환상 문학의 주류가 된 작품은 JRRT나 C. S. Lewis의, 신화적이고 종교적인 색채가 묻어나면서 정치적으로는 강하게 보수적인 성향을 띠는 글들입니다. 톨킨이 정착시킨 환상 문학의 신화적 속성과 더불어, 환상 문학을 창작하는 계층이 중산층 이상, 상류층이었다는 점 때문에 환상 문학은 주로 비사회적인 메시지를 담게 되었고 Chronicles of Narnia에서도 볼 수 있듯이 종교적인 색채 역시 띠게 되었으며, 특히 영웅 중심의 서사 구조는 이런 성격을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런 경향은 최근에 이르기까지, 특히 영국에서 계속되어 왔습니다. (미국에서는 어슐러 르 귄과 같은 작가들이 있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경향에 정면으로 반하는 주제를 띠고 있습니다. 몇몇 기독교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 작품이 반종교적인 주제를 전달하고 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만, 이 작품은 맹신과 맹종 대신에 합리적인 사고와 지식을 바탕으로 한 결정을 내릴 것을 제시하며, 지식과 사고에 열린 사고와 닫힌 사고를 대비시키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 protagonist인 Lyra와 Will에 대비되는 antagonist가 카톨릭 교회라는 사실 역시 이 점에 어느 정도 기여합니다. 작품에 등장하는 카톨릭 교회는 현대의 기독교를 대변한다기보다는 병행 세계라는 점에서도 쉽게 알 수 있듯이 르네상스 이전의 카톨릭 교회와 닮은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작품의 무대가 되는 병행 세계에서는 종교 개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또한, secular humanist를 자처하는 필립 풀먼이 비판하는 여러 대상들 중 하나인, 서아시아의 여러 이슬람 국가들의 정교일치적인 모습을 카톨릭 교회는 나타내고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 2부에서 등장하는 조연 캐릭터인 Ruta Skadi는 이슬람권 국가에서 흔히 행해지는 여성의 할례에 대해 직접적인 비판을 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작가 자신도 해명했듯이 이 작품은 반드시 종교를 가리켜 비판하고 있다기보다 종교에 대한 광신을 비판하는 경향이 더 강하고, 이런 광신으로부터 벗어날 것을 종용하고 있습니다.

(2부에서 계속)

Posted by Asuka Feanaro HR

일단, 저는 인문학이 학문으로서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물리학이나 화학을 공부하는 분들의 입장에서는 생물학에 대해서도 비슷하게 여기실지 모르겠습니다만, 적어도 생물학은 과학적인 탐구 방법을 사용해 자료를 수집하고 그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결론을 내린다는 면에서 최소한 무엇인가를 제대로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부를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탐구하기 위해서는 분석할 만한 자료가 필요하다는 것은 굳이 다시 말할 필요가 없는 사실이고, 아무리 인간의 기본적인 생리적 기작이 비슷하다고 해도 머릿속에서 짜낸 결론만으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지극히 힘들지요. 물론 객관적인, 또는 최소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료를 수집하여 그것을 바탕으로 결론을 내리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학이나 고고학의 경우에는 제가 말한 것과 같은 결론이 성립하지 않겠습니다만, 적어도 철학만은 말장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이유로, 철학이야말로 진정한 지적 사기라고 저는 봅니다.

제가 인문학의 무가치성을 주장하는 데에는 두번째 이유가 있습니다.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지극히 인간 본위적인 학문이라는 점입니다. 인간의 사고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 그 무언가를 알 수 있다는 식의 철학적 사고를 저는 혐오합니다. 기본적으로 인간은 동물군 중에서 그 수가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척추동물, 그 중에서도 특히 고도로 분화된 포유동물의 일부로서 세계의 지극히 작은 한 조각을 이루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순전한 말장난을 통해서 실험과 관찰을 통해 밝혀진 과학적 사실들에 대해 반박하려 하거나, 과학까지도 말장난으로 만들어 버리려 하는 시도는 인간의 오만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약간 핀트에서 벗어났다는 느낌도 있습니다만, 현대 인류가 일으키는 수많은 문제들 역시 인문학이 가져온 인간의 오만에 비롯한다고 생각하는 저로서는 더욱 인문학을 곱게 보기 어렵군요.

어쨌거나, 쓰게 될 글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서론: 인간에 대한 두 가지 체계
 (1) 사회생물학 논쟁: 생물학은 인간을 설명할 수 있는가
 (2) 앨런 소칼 사건: 그렇다면 인문학은 인간을 설명하고 있는가

본론
 (1) 현대 생물학의 발달에 따른 과학적 인간관의 발전
 (2) 과학적 인간관에서 보는 인간의 사고와 사회적 행동
 (3) 인문학의 학문적 의미 1 - 인간은 특별한 위치의 생물인가
 (4) 인문학의 학문적 의미 2 - 인문학은 검증가능한 학문인가
 (5) 과학적 인간관에 바탕한 휴머니즘의 가능성에 대하여, 또는 휴머니즘을 넘어선 그 무엇을 위하여

결론: 수렴, 혹은 흡수를 위하여
 인문학적 사고 방식만으로 바라보는 인간관은 어떻게든 왜곡되기 마련이다. 도그마에 얽매이지 않은, 정말로 ‘인간다운’ 인문학은 과학적 사고와 탐구 방법을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9월 20일쯤에 완성될 글입니다.

Posted by Asuka Feanaro HR

이런 짓 좀 하고 있었습니다;
심심해서...는 아니고 학교 숙제입니다만, 코드와 멜로디만 있는 악보로 미디를 만들어오라네요 ㄱ-
뭐 들을만한지 어떤진 전 모를일입니다;
게다가 VST가 하나도 안깔려있어서 그냥 닥치고 1번, 피아노인지라..; 듣기 거북하신 분은 알아서 수정을(...)

Posted by Asuka Feanaro HR

흰 눈 쌓여 저무는 겨울날
핏빛 구름은 머리 위를 가리고
어두운 등에 기대어 북을 보노라

깊이 잠든 세상에 홀로 깨어서
눈을 스치는 것은 거짓 꿈 속
나타날 길 없는 흐릿한 님의 모습
하나하나 스러지는 머나먼 별들이
죽음을 향해서 몸부림치듯
흔들리더라도, 씻지 못할 더러움에
마지막 숨결까지 보태더라도
멀리서 웃는 그리운 모습 잃지 않으리라고
이어지는 흰빛 밤 위에 드리워
푸른 그림자는 낯을 적시네

고개 저으며 다시 눈 뜨고
달려가 지나친 어두운 들길 한켠에
맑은 바람은 잦아들어 흩어지나니
내린 눈더미 위에 쌓이는 것은
꿈의 틈새로 떨어진 기억 한 가닥
내 다시 저 얼음에 파묻혀
멀어지는 그대 그림자마저 놓치면
투명하게 티없이 흔들리지 않고
목숨 없는 조각처럼 남아 있으리

말 하나 건네지 못한
꿈 속의 님이여

Posted by Asuka Feanaro HR

하필 무려 분실ㅡㅡ;하고 게다가 컴까지 깨먹은ㅡㅡ;고로 리뷰가 늦어진 데다가, 카메라까지 실종되어 사진은 첨부하지 않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게다가 리뷰의 양이나 질도 약간 떨어지는 느낌입니다만, 찬찬히 시간 나는 대로 보충하겠습니다;

일단, 이어폰의 외형은 지극히 평범합니다. mx400처럼 천원짜리 이어폰이냐는 소리가 나올 정도의 디자인은 아닙니다만, 검은색과 무광 은색을 주로 하여 K310P, K312P, K314P에 공통되는, 유닛 아래로 튀어나온 부분이 둥글게 처리된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다른 분들의 사진을 보셨으면 이해하실 겁니다;) 비록 audio-technica나 SONY와 같은 회사의 이어폰처럼 깔끔한 디자인은 아닙니다만, 실제로 착용해 보면 착용감이 좋고 귀에 잘 들어가는 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보기 안 좋기로는 젠하이저 이어폰과 피차일반이라고 생각했지만 귀에서 의외로 거의 빠지지 않는다는 점에 상당히 감명받았으니까요. 선재 역시 실용적인데, 완전히 접힐 수 없도록 탄성이 강한 고무 재질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이런 선재는 SONY나 젠하이저에서도 채택하고 있습니다만, 탄성이 이 두 회사의 이어폰 선보다 떨어지는 대신에 강도는 상대적으로 높아 선이 꼬이는 일이 없다는 면이 편리합니다. 이어폰이 대칭형이라는 점도 목에 걸고 다니기는 어려우나 선이 굳거나 이어폰이 잘 고정되지 않는 경우를 방지할 수 있어서 제 마음에는 드는군요.

다음으로 중요한 소리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K314P는 비슷한 가격대의 mx500이나 MDR-E931과 마찬가지로 소리의 질에서는 상당히 만족스러운 이어폰입니다. 일반적으로 30000원 이하의 저가형 이어폰은 각 음역이 잘 구분되지 않고 뭉친 상태로 들리는 경우가 많은데, 이 이어폰은 각 음역대 사이를 구별하기에 문제가 없었습니다.(사실 받자마자 계속 음악숙제용으로 사용했습니다;) 또한, 어느 정도 이상이나 이하의 음역대를 재생하지 못하는 문제나 변동이 큰 부분에서 명확한 음이 들리지 않는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이 이어폰의 성향은 mx500이나 MDR-E931과 약간 다릅니다. MDR-E931이 전체적으로 모든 음역대를 고르게 재생하며 특히 중고음과 저음이 약간 증폭되어 있으며, mx500이 중음에 비해 고음과 저음이 약간 더 강한 음색을 내는 데에 비해 K314P는 중저음 대역이 다른 음역에 비해 매우 작은 음량을 갖습니다. 중저음 대역은 지나치게 증폭될 경우 답답한 느낌을 줄 수 있고 음악 전체의 해상력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낮추었을 때 상당히 큰 효과를 볼 수 있습니다. 이퀄라이저를 사용해 억지로 낮추었을 때와 달리 음량은 작지만 선명한 저음이라는 점도 중저음 대역의 음량이 작다는 것을 장점으로 만듭니다. 이처럼 작은 음량의 중저음에 비해서 저음역의 양은 약간 더 많은 느낌인데, 음의 해상도를 확보하면서도 빈 소리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 처리입니다. 흔히 사용되는 V자 EQ에 비해서도 중음역대의 음량을 지나치게 줄일 경우에는 보컬이 들리지 않거나 대부분의 악기들이 잘 들리지 않는다는 단점이 없다는 점에서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장점을 갖는 장르를 평가해 보자면, 어쿠스틱기타나 피아노 류의 현을 뜯거나 두드려 소리를 내는 악기가 많이 포함된 곡에서, 그리고 음역대가 넓은 가성을 사용하는 여성 보컬의 곡에서 높은 해상도가 갖는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 이어폰을 구입하신 분에게 개인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곡은 Angela의 Separation과 우타다 히카루의 The Beautiful World, 사카모토 마아야의 Hemisphere입니다.

Posted by Asuka Feanaro HR

인상문답.

2008/04/15 10:31

pilgrim님 댁에서 업어왔습니다 :)

1 :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의 성격

그냥 쾌활하고 사람이랑 얘기하는 거 좋아하는 오덕입니다.
가끔 좀 까칠해서 싸움 나기도 합니다만...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죠 ^0^
참말인지 거짓말인지는... (제로스풍으로) 비밀입니다!

2 : 남에게서 듣는 자신의 성격

일단 '즐겁다'로 업어왔습니다.

친구들 말로는 4차원적이라고 합니다만.;
가장 오래 알고 지낸 친구 하나는 '오덕오덕'이라고 요약하는군요 ;ㅅ;
대충만 아는 사람들 말로는 별 말 없고 괴팍하다...라네요.
(으악 이사람들이 왜 이러시나..)

3 : 남녀관계 없이 친구의 이상

(1) 아는 게 많은 사람
(2) 배려심있는 사람
(3) 다음의 '4대 악'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
 - 권위를 내세운다
 - 이기적'이기만 하거나', 이타적'이기만 하다'
 - 집단 논리를 내세운다
 - 직간접적인 위해를 가하지 않는 사람을 비난한다

...입니다 :)

4 : 좋아하는 이성의 이상

취향은 '대충만' 비슷한 게 좋습니다.(이래야 할 얘기가 많아지더라구요^^)
겉으로는 어떻든, 배려심있는 사람이 좋겠네요.
아, 미중년이면 가산점 있습니다(??)

5 : 최근 남에게서 들어서 기뻤던 말

진정한 오덕후적 기억력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_+
오덕후적...은 관두고라도 기억력 좋단 얘기를 들으니까 기쁘군요.

6 : 바톤 넘겨준 분 얼굴 본 적 있어?

없습니다.
(과연 어떤 얼굴이실는지...)

7 : 넘겨준 분의 인상은?

진지하면서 유쾌한 분이라는 인상이군요.
영어와 일본어를 잘 하시는 것 같아서, 부럽습니다!

8 : 바톤을 넘길 사람

●クール(쿨하다) →
●残酷(잔혹하다) →
●可愛い(귀엽다) →
●癒し(치유계) →
●かっこいい(멋지다) →
●面白い(재미있다) →
●楽しい(즐겁다) →
●美しい(아름답다) →
●頭がいい(머리가 좋다) →
●礼儀正しい(예의바르다) →
●大人(어른) →
●子供(아이) →

들러주시는 분(있으려나..) 중에서 해보고 싶으신 분은 알려주세요 +_+

Posted by Asuka Feanaro HR

CM700은 사실 취향상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만, 고음이 EM7과 비슷하다는 소리를 듣고는 EC7을 구하고 싶어 동분서주했습니다. 결국 구하지는 못하고, 꿩 대신 닭이라는 심정에 예전에 CM700을 제공해 준 김모군이 새로 지른 EC700을 획득(...)해서 일 주일 동안 들어 보고 있습니다. 7보다 고음이 약하다고 해서 또 CM700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제 취향에 들어맞는 음이어서 즐거웠습니다.

일단 전체적으로 EC700은 EM7과 비슷한 성향을 가진 이어폰입니다. 다른 음역대에 비해 고음과 저음이 부각되어 있으며, 답답한 느낌을 크게 주는 음역인 150~300Hz 대역이 작은 음량을 갖습니다. 단, 오르내리는 폭이 극단적으로 크지 않고 완만한 곡선을 그리기 때문에 거칠다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남성 보컬이나 전자 기타의 음이 비교적 빈약하지 않다는 것도 이런 완만한 V자형 응답 곡선의 장점입니다. 해상력 역시, 답답한 느낌을 주어 해상력을 감소시키는 음역들이 모두 낮은 음량으로 설정되어 있어 크게 증가합니다. 이전의 CM700과 달리 중고음은 그다지 강하지 않고 고음이 강한 편인지라, 오래 듣고 있을 경우 귀가 아프다는 느낌은 덜 듭니다.(일반적인 노래에서 고음에 비해 중고음의 음량이 크기 때문에, 주로 고음 성향의 이어폰에서 귀가 아픈 느낌은 고음보다는 중고음에 의해 일어나게 됩니다.) 단지, 고음역 강조는 상당한 양의 치찰음을 불러일으킵니다. 일본 음악을 자주 듣다 보니 s나 z, ts 음에 의해 일어나는 치찰음에 민감한 편입니다만 주력으로 사용하는 MX500과 HTX7, EM7에 비해서 치찰음이 심해 이 점은 신경에 거슬립니다.

치찰음만을 확인하기 위해 두 곡을 들어 보았습니다. 첫번째 곡은 타카하시 요코의 残酷な天使のテーゼ입니다. 일본어 발음의 특징 중 하나는 s나 z, ts와 같은 음이 분명하다는 점입니다. 타카하시 요코의 발음은 상당히 정확한 편이라는 점 때문에 이와 같은 발음에서 발생하는 치찰음을 테스트하는 데에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영어의 s, z 발음을 테스트해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영어 가사를 채택한 곡 중에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인물이 부른 곡은 없었습니다) 두번째 곡은 한국 가수 박정현의 祈り~You Raise Me Up~으로, 박정현 씨의 발음은 전형적인 한국인의 발음에 속합니다. 이 때문에 치찰음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사가 영어나 한국어로 쓰인 곡을 사용하지 않은 데는 다른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치찰음의 정도가 가장 심한 언어가 일본어였기 때문입니다.)

타카하시 요코의 음성은 EC700의 성향과 마찬가지로 중음보다 고음과 저음이 강조되는 형태를 띤 특이한 목소리입니다만, EC700은 이와 같은 목소리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첫번째 곡에서는 z보다는 s와 ts 음에서 강한 치찰음이 느껴졌습니다. 타카하시 요코의 발음뿐만 아니라 일본어 음운의 특성으로 인해 어느 정도의 치찰음은 비켜갈 수 없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EC700에서의 치찰음은 예상되는 정도를 넘어서, 상당히 귀가 거슬리는 음역대인 14khz 이상의 고음이 치찰음에 섞여서 나오는 느낌을 줍니다. 평소에 즐겨 듣던 노래였던지라 가사를 알고 있었는데도 해당되는 발음이 나올 때마다 질겁해서 결국 이 곡에 대해서는 두 번 반복해서 듣고 테스트를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두번째 곡을 부른 박정현 씨의 음성은 비록 그 음역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타카하시 요코의 음성과 반대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발음 역시 음성이 전체적으로 저음과 고음보다는 노래하는 음 그 자체, 즉 중음에 치중한 음성입니다. 이 때문에, s나 z(박정현 씨의 노래에서는 j에 가깝습니다만)에서는 치찰음이 크게 들리지 않고 ts에서만 약간의 치찰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중저가형의 이어폰보다 뛰어난 해상력과 고음으로 인해서 좋은 음을 들려 주기 때문에, 이 곡에 대해서 EC700은 매우 뛰어난 성능을 발휘합니다.

또한 이 이어폰의 특징으로는 넓은 공간감을 들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은 개인적인 느낌으로 인한 차이가 있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전문가가 아닌 관계로 그냥 쓰겠습니다 - 진동판의 넓이나 귀로부터의 거리만으로 인해서 좌우된다고 하기에는 비슷한 크기의 오픈형 이어폰들이 가진 공간감의 차이가 너무 컸고, 응답 곡선만으로 인해서 결정된다고 보기에도 이퀄라이저를 이용한 실험에서 볼 때 어렵더군요.) 보컬로부터의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EC700의 음색은 보컬을 중심에 두었을 때 주변의 악기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는 것처럼 들립니다. 이와 같은 배치는 악기 사이의 소리를 구분하는 데 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청음 연습과 같은 음악 감상 이외의 용도로도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C700은 CM700에 비해 Audio-technica 특유의 음색을 더 잘 나타내는 이어폰입니다. CM700이 중고음 중심의 맑으면서도 약간 답답한 음색을 들려 주었던 데 비해, EC700은 넓고 시원하다는 인상을 줍니다. 음 사이의 균형에 있어서는 CM700이 더 뛰어납니다만 균형을 떠나서 음악에 대한 표현력을 고려할 경우 EC700이 CM700을 압도한다고 생각합니다. 음악을 모니터링하지 않고 감상하기 위해서 듣는다면, 단순히 균형 잡힌 음색을 들려 주는 것보다는 넓은 공간감이나 해상력과 같은 분명한 장점을 가진 이어폰이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Asuka Feanaro HR

지금 보니 미숙한 면이 상당히 있습니다만, 에바오덕으로서의 첫 걸음을 내딛게 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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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종류의 텍스트이건 간에, 재미와 인기가 항상 정비례하지는 않는다. 재미있는 작품이라는 기준 자체가 주관적이라는 점은 제쳐 두고라도, 텍스트로서의 가치 이전에 문화 상품으로서의 가치를 갖는 현대의 매체에 있어서 그 매체의 재미를 따지기 전에 거론되는 것은 상품으로서 그 매체가 대중에게 알려진 방식이다. 때로는 그 방식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때로는 그 방식이 지나치게 효율적이기 때문에, 텍스트의 질과 무관하게 그러한 매체는 사람들에게 편견으로 전달된다. 여론을 좌우하는 도구로써 흔히 쓰이는 요즈음의 신문과 같은 매체들이 갖는 지극히 공격적이고 노골적인 선전 방식에 비하지는 못하겠지만, 소설, 연극, 영화나 애니메이션의 대본 등과 같이 비록 상업적이라 해도 일단은 예술로 치부되는 준야에서도 이런 현상은 자주 나타난다. 반지의 군주나 해리 포터와 같은 소설을 영화화해 상업적으로 이용하거나 다양한 경로를 통해 관련 상품을 개발해 판매하는 현상(흔히 one source multi use라고 불리우는)에서도, 교정이나 번역, 혹은 편집에 소모되는 비용보다 오히려 서적에 대한 광고 비용이 더 들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사실에서도 이런 현상을 찾을 수 있다. 애니메이션 분야에서 가장 흔한 예로는 Sunrise 사에서 감독마저 계속 교체해 가며 건담 시리즈를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계속 제작해 온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문제로 인해, 아무리 그 자체로는 완성도가 평균 이상인 작품이라고 하여도 작품의 성패를 결정하는 것은 주로 작품을 선전하는 방식이다. 특히 요즈음의 작품들은 대부분 어떤 의미로든 평균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점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이런 면에서 볼 때, 국내에서는 GAINAX의 작품 [신세기 에반겔리온]이 그다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소수의 팬층을 확보하기는 했지만, 일부러 꼬아 둔 듯한(하지만 그런데도 너무나 분명한) 주제 의식과 감독의 sensational한 발언, 15세 이상 관람가라는 등급에 비해 정도가 높은 외설성과 폭력성(하지만 19세 이상 관람가로 두기에는 성장물이라는 장르의 한계에 의해 불가능하며, 그럴 만큼 외설적이거나 폭력적이지도 않다), 애니메이션의 인기를 이용한 관련 상품의 판매, 가깝게는 신작 극장판(Rebuild of Evangelion) 제작 등으로 이 애니메이션은 많은 애니메이션 팬들의 분노를 샀다. 특히, 거의 무책임하다고까지 할 수 있을 만큼 난해하고 산만한 구성의 최종화(극장판 The END OF EVANGELION 第26話 まごころを君に)는 더욱이나 이 작품에 대한 악평이 쏟아지는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악평이 빗발치는 작품이라고 해도, 그 완성도 자체는 특히 요즈음 범람하는 미소녀 애니메이션들에 비해 낮다고 하기 어렵다. 오히려 이 작품이 1995년작이고 TV 시리즈라는 것을 고려해 볼 때, 장면의 연출이나 색감, 작화 등에서는 가히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전작인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와 비교해 볼 때 특히 작화는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으며, [바람의 계곡의 나우시카]에서 볼 수 있던 특유의 액화 장면(거신병이 쓰러지는 장면이 안노 히데아키가 담당한 부분이다)은 최종화에서 그 모습을 다시 보였다. 전작 [나디아]에서부터 음악을 담당했던 사기스 시로의 사운드트랙 역시 극중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산만하고 불성실한 극장판은 작화나 음악 면에서만은 TV 시리즈에 비해 완성도 높은 면모를 보였다.

 이 때문에, 이 작품에 가해진 극도의 혹평은 작품 자체만큼이나 그 배경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난삽하기 그지없는 후반부의 내용과 부실한 종결이 텔레비전 방영이라는 한계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1~2쿨의 짧은 작품이나 혹은 조기종영되는 많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신세기 에반겔리온] 역시 26화 완결작이라는 제약을 안고 있다. 25화 [끝나는 세계終わる世界/Do you love me?]/[Air/Love is destructive.]와 26화 [세계의 중심에서 '나'를 외친 괴물世界の中心でアイを叫んだけもの/Take care of yourself.]/[진심을 그대에게まごころを君に]는 지나친 급전개에 의해 발생하는 문제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즉, 이 작품의 난해한 면은 그 내용뿐만 아니라 1~2쿨의 짧은 애니메이션 제작에 익숙하지 않은 제작진의 실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 다룬 '인류 보완'의 개념도 이와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이 개념 자체는 아서 클라크의 [유년기의 끝Childhood's End]에서 비롯된 것으로, 비록 Komm,Susser Tod来たれ、甘き死よ에서 볼 수 있는 용해 장면과 같이 시각적인 충격을 주지는 않지만 [유년기의 끝]에서도 완전히 함께 행동하는 인류의 아이들이나 흡수되어 버린 지구처럼 운명론적이며 묵시록적인 상징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26화 [진심을 그대에게]에서 볼 수 있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강조에 대비된다. 하지만 그 소재에 있어서 이 작품의 후반부는 여러 다른 작품, 특히 과학 소설에 의존하고 있다. 이 작품을 비판하는 이들의 주장대로 이러한 부분은 짜깁기에 기반하며, 종종 이 작품과 함께 (흔히 오타쿠로 잘못 불리우는) 일본 문화 소비자들의 문화 코드로 여겨지기도 하는 나스 키노코나 마에다 쥰의 텍스트 게임들과 마찬가지로 독창적이지 못하고 어느 정도 컬트적인 내용(이 점에서 마에다 쥰은 안노 히데아키나 나스 키노코와 다르다. 그의 작품에서는 컬트적이기보다 보편적이며 감성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어, 이 둘과 다르게 취급되기도 한다)을 닮았다. 이 때문에 더더욱 상업성에 대한 비판에서 이 작품은 벗어날 수 없다. '인류 보완 계획'은 이러한 이 작품의 성격을 극명히 드러낸다. 작품을 이끌어 나가는 축이 결국은 이전에 사용되었던 주제에 대한 오마주에 불과하다는 점은 그만큼 작품이 다룰 수 있는 내용을 제한한다.

 하지만 패러디적 속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케로로 군조]나 [스즈미야 하루히]에 대한 애니메이션 팬들의 호의적인 반응을 볼 때, 이 작품을 애니메이션 팬들의 혐오 대상으로 전락시킨 것은 그러한 속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제작진의 무책임한 태도일 것이다. GAINAX의 작품들 [왕립우주군 - 오네아미스의 날개]나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등에서 안노 감독을 필두로 한 제작진은 매니아 계층이라고 해도 충분히 상업적인 수준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음을 입증했지만, 이 작품, 그리고 특히 후반부에서 제작진은 매우 무책임한 태도를 보였다. 외주 제작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대규모의 제작사도 아니었을 뿐더러 CG 역시 널리 사용되지 못했던 1995년 당시의 상황(단순하고 반복적인 작업 이외에는 처리할 수 없었다고 한다)에 의해, 1주 1회의 방영을 유지하면서 작화의 품질을 떨어뜨리지 않기는 어렵다. 시나리오 작가가 아닌 작화 분야에서 출발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안노 히데아키에게 후반부 구성을 보완할 수 있는 역량이 없다는 것도 상당 부분 그 이유가 된다.

 이 점에서, 이 작품은 용두 사미라는 한계를 거의 노골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특히 TV 시리즈 23화 淚/Rei III 이후의 내용 전개는 그야말로 멈출 수 없는 폭주로 치닫는다. 아야나미 레이의 자폭으로 인한 제 3 신동경시의 소멸은 개연성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그렇다면 가출해 있던 아스카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의문, 또는 NERV 본부는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는지를 작품은 설명할 수 없다. 그 이후에 있어서도 작품을 그나마 볼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던 구성들은 붕괴한 것이나 다름없다. TV 시리즈 25화에서 연출이라 할 만한 요소는 정지 화면을 이어 놓은 듯한 느낌을 주는 일련의 회상들이며, 26화의 '보완' 과정 역시 리테이크된 셀로 만들어진 듯 서투른 수준이다. 일부의 팬들은 이런 결말을 오히려 극장판에 비해 선호하지만,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분명 TV 시리즈의 결말은 (1960년대의 애니메이션과 비교하더라도) 가히 최하 수준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한 설정을 즐기는 매니아 계층의 일원으로서 제작진은 실감하지 못했을지 모르나, 편수가 많지 않은 1~2쿨의 애니메이션에서, 방영 내용만으로는 소화하기 어려울 정도의 복잡하거나 방대한 구성 혹은 복선을 채택하는 것은 극히 위험하다. 안노 히데아키 자신이 밝혔듯이 이런 복선들이 작품의 주된 내용과 무관하게 단지 재미를 위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특히 이 설정들은 더욱 작품에 있어 위험하다. 줄거리만으로는 주된 적들의 이름이 아담과 릴리스와 샤키엘과 타브리스가 아니라 해도, 오프닝에 세피로스의 나무 따위가 등장하지 않는다 해도, (에반겔리온 극장판을 17세 미만 관람불가로 만들고 시청자들에게 심한 혐오감을 준)아스카의 2호기가 뜯어먹히는 장면이 없었다 해도 작품의 전개에는 어떤 무리도 없었을 것이다. 사해 문서나 십자가에 롱기누스의 창으로 고정된 릴리스의 주검과 같은 유대 교-크리스트 교적 상징들은 작품의 줄거리에서 무의미하며 '빠진 고리missing link'의 수만 늘리는, 불필요하고 해결되지 못한 복선이다. 안노 히데아키는 건담이나 은하철도 999와 같이 복잡하고 방대한 설정을 가진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으나, 그는 그러한 작품들이 최소한 2기 8쿨 이상의 TV 시리즈와 두 개 이상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지나치게 '심각한'접근 방식은 장애가 될 뿐이다. 몇몇 사정 모르는 이들의 말처럼 불후의 명작도 아니며, 일부 애니메이션 팬들의 말처럼 낚시에 급급한 졸작도 아니다. 오히려 이 작품은 청소년 성장물이라는 틀을 최대한 '재미있게' 각색한, 굳이 분류하자면 영국 등지의 환상 문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청소년 문학Young-Adult Fiction'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안노 히데아키 자신이 말했듯이, 그리고 몇몇 비평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이 작품은 성장 소설을 소름 끼치는 장면과 선명한 원색으로써 그려 낸 '잔혹한 유희의 명제' 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Asuka Feanaro HR